11세기 후반, 교황과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벌인 치열한 권력 다툼 속에서 독일의 작은 공국이 역사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바로 색슨 공국인데요. 교황을 등에 업고 황제에 반기를 든 색슨 공작 하인리히와 절대 권력을 추구한 황제 하인리히 4세의 숨 막히는 대결, 전쟁과 내란으로 점철된 30여 년간의 색슨 전쟁 속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중세 봉건제도의 모순과 교황권의 위상이 어떻게 충돌하고 변화했는지, 그 속에서 색슨은 어떤 운명을 맞이했는지 생생하게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색슨 전쟁의 배경

11세기 신성로마제국의 정세

색슨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인 11세기 중후반, 신성로마제국은 사실상 독일을 중심으로 한 느슨한 연합체에 가까웠습니다. 각 지역의 제후들이 자치권을 누리는 가운데, 황제는 그들을 통제하기 위해 애쓰는 형국이었죠.

교황과 황제의 미묘한 관계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통제력은 로마교황에게 있었습니다. 카노사의 굴욕으로 유명한 하인리히 4세의 아버지 하인리히 3세조차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고 손을 잡아야 했죠. 교황이 황제의 수호자이자 견제자로 군림하던 시대였습니다.

제후들의 불만과 반발

한편 황제의 중앙집권 시도에 불만을 품은 제후들도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색슨의 제후들은 줄곧 반(反)왕조 운동의 선봉에 섰죠.

빌룽가 왕조의 위상

색슨을 다스리던 빌룽가 왕조는 프랑크 왕국 시절부터 황제에 버금가는 세력이었습니다. 936년 막대한 영지와 특권을 보장받으며 왕위 계승에서 배제되는 대신 옥토 1세를 황제로 추대하기도 했죠.

그레고리우스 개혁과 반발

여기에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의 급진적 교회 개혁이 도화선이 됩니다. 성직자의 독신제 의무화, 성직 매매 금지 등을 내세우며 교회의 도덕성을 강조한 것인데, 정작 제후들은 자신들의 기득권 축소로 받아들였죠.

전쟁의 발발

작센 궁전 사건

1073년 작센 궁전에서 벌어진 사건이 전쟁의 시작이었습니다. 작센 공작 오토가 황제의 친위대에 피살된 것인데, 황제의 사주로 의심되며 색슨 귀족들의 공분을 샀죠.

하르츠부르크 성 함락

분노한 색슨군은 하르츠부르크에 있는 황제의 성을 포위하고 함락시킵니다. 황제 하인리히 4세는 모욕감에 치를 떨며 반격을 다짐했죠.

황제의 보복과 승리

1075년 황제는 대군을 이끌고 색슨을 공격해 일시적으로 제압합니다. 하지만 이는 색슨의 저항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고 말았죠.

카노사로 가는 길

한편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황제의 교회 지배를 우려해 파문을 선언합니다. 궁지에 몰린 하인리히 4세는 카노사로 가서 사죄하지만, 교황과 제후들의 불신은 걷히지 않습니다.

권력의 추와 균형

황제와 교황의 각축전

색슨 전쟁의 이면에는 교황권과 황제권의 角逐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누가 더 우위에 서느냐를 두고 두 권력이 기나긴 힘겨루기를 벌인 것이죠.

카노사의 굴욕

1077년 1월 하인리히 4세는 이탈리아의 카노사 성에서 교황의 용서를 빌어야 했습니다. 버선발로 사죄하는 모습은 황제권의 치욕적 패배로 비쳐졌죠.

제후들의 이반과 루돌프 공작

교황의 지지를 등에 업은 제후들은 하인리히 4세에 맞설 루돌프 공작을 맞황제로 내세웁니다. 루돌프는 그레고리우스 7세로부터 면류관을 수여받기도 했죠.

하인리히 4세의 반격

그러나 하인리히 4세도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1080년 브릭센 공의회를 열어 그레고리우스 7세를 폐위시키고 클레멘스 3세를 새 교황으로 옹립하죠.

로마 함락과 황제의 대관식

이듬해에는 직접 이탈리아로 진격해 4년간의 포위 끝에 로마를 함락시킵니다. 드디어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클레멘스 3세로부터 황제관을 받게 되죠.

전쟁의 종결

장기화된 내전과 타협의 모색

하지만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맞황제 파와 교황 파, 황제 파 간의 내전이 15년 가까이 이어졌죠. 피폐해진 제국의 현실 앞에서 평화를 모색하는 목소리가 힘을 얻기 시작합니다.

보름스 협약의 체결

1122년 카이저스베르트에서 제후들이 회합을 갖고 타협안을 마련합니다. 이것이 같은 해 9월 체결된 보름스 협약으로 이어지죠. 성직자 서임권을 교황에 넘기는 대신 황제의 면류관 수여권을 인정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색슨의 운명

장장 30년을 끌어온 전쟁에서 색슨은 어떤 운명을 맞이했을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색슨의 반란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빌룽가 왕조의 몰락

전쟁 말기 색슨은 내홍에 휩싸이고 영토는 농지로 전락했습니다. 1106년 마지막 빌룽가 후계자마저 죽으면서 권력은 황제에게 넘어갔죠.

새로운 지배자 수펠린부르크가

이후 색슨은 황제 하인리히 5세가 봉토로 삼은 수펠린부르크가의 지배를 받습니다. 로타르 3세를 배출하며 잠시 면모를 되찾지만, 이내 황제권과 밀월 관계를 유지하며 온건한 길을 걷게 되죠.

색슨 전쟁은 표면적으로는 황제와 교황, 제후 간의 권력 투쟁이었지만 그 밑바닥에는 중세 봉건제의 모순과 한계가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색슨의 반란은 교황을 등에 업은, 절대권에 맞선 지방 분권의 몸부림이었다고 할 수 있죠.
비록 빌룽가 왕조는 몰락하고 보름스 협약으로 교황과 황제의 줄다리기는 일단락되지만, 이 전쟁이 중세 봉건 질서에 던진 물음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과연 황제는 교회를 지배할 수 있는가, 또 제후들을 통제하며 중앙집권을 이룰 수 있는가. 이는 중세사를 통틀어 되풀이되는 화두이기도 했죠.
한편 전쟁의 참화 속에서 색슨 민중이 겪은 苦難 역시 잊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들에겐 교황이든 황제든 그저 멀고 먼 존재였겠지만, 덩치 큰 자들의 싸움에 말려든 대가는 피눈물로 치러야 했으니까요. 역사의 격랑 속에서 휘청거리는 약자의 모습이 오버랩되는 건 비단 색슨 전쟁뿐은 아닐 테지요.
색슨 반란은 중세 제국이 안고 있던 구조적 모순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절대권을 둘러싼 각축, 그리고 그에 맞선 지방의 저항. 이는 민족국가 시대로 넘어가는 초읽기나 다름없었죠. 색슨이 걸었던 아픈 길은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유럽 전체의 진통이기도 했던 셈입니다.
앞으로도 인류의 역사는 갈등과 화해의 연속이겠지만, 그 속에서 색슨처럼 시대에 저항하고 희생되는 수많은 약자들이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교훈을 얻고 상처를 어루만지며 더 나은 내일을 만드는 게 우리의 숙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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