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유럽의 전쟁사에서 가장 독특하고 인상적인 전술 중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 ‘바겐부르크’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말 그대로 ‘마차 요새’를 뜻하는 이 전술은 네발 달린 우마차를 전장에 원형으로 배치해 방어선을 만드는 것인데요. 기동성과 화력, 방어력을 모두 갖춘 바겐부르크 대형으로 후세미아와 타보르파의 용맹한 전사들은 유럽 최강을 자부하던 기사들의 무쇄를 꺾고 승리를 거두곤 했습니다. 기사도 문화 전성기에 평민 출신 군대가 이룬 혁신, 바겐부르크 전술의 비밀을 파헤쳐 보겠습니다.

바겐부르크 전술의 태동

후세미아의 반란과 전술의 모색

15세기 초 왕위 계승 문제로 내전에 휩싸인 보헤미아. 개혁파 성직자 후스의 처형에 분노한 추종자들이 일으킨 반란이 전국으로 번지게 됩니다. 후세미아의 지도자 얀 지슈카는 기사군단에 맞설 전술을 고민하게 되죠.

전통적 전술의 한계

중세 전쟁의 핵심은 중무장한 기사들의 돌격이었습니다. 그러나 후세미아군은 기사도 출신이 적어 정면승부가 어려웠죠. 지슈카는 기사들의 장점을 최소화하면서도 약점을 공략할 방안을 모색합니다.

이동성을 활용한 새로운 전술

지슈카가 주목한 것은 기사들의 무거운 갑옷이 오히려 약점이 될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조금만 기동력에서 앞선다면 언제든 빈틈을 노릴 수 있을 터였죠.

경장갑 차량의 동원

지슈카는 당시 흔히 쓰이던 경장갑 4륜 우마차에 주목합니다. 나무판으로 차체를 둘러싸고 총안을 내는 등 약간의 개조만 거치면 이동성과 방어력을 겸비한 전투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죠.

‘신의 전사들’과 바겐부르크의 조합

개조차량에는 ‘신의 전사들’이라 불리던 후세미아군 보병들이 탑승했습니다. 이들은 창과 철퇴 등으로 무장하고 기사들의 빈틈을 노렸죠. 이렇게 마차와 보병이 결합된 전술, 그것이 바로 바겐부르크의 시작이었습니다.

바겐부르크의 전술적 특징

방어와 공격을 겸비한 진형

바겐부르크 진형의 핵심은 마차를 둥글게 배치해 만든 방어선입니다. 안쪽에는 보병과 포병이 자리하고, 기병은 바깥쪽에서 측면을 엄호하죠.

마차 요새의 견고함

둥글게 늘어선 마차는 마치 성벽과도 같은 역할을 합니다. 차체에는 총안이 뚫려 있어 안에서 밖을 향해 화살이나 화약무기를 쏠 수 있었죠. 간혹 차량 사이를 쇠사슬로 연결해 견고함을 더하기도 했습니다.

기동타격대의 역할

마차 안에 탄 ‘신의 전사들’은 언제든 빠져나와 적의 빈틈을 노릴 준비가 되어 있었죠. 대형을 유지하며 서서히 이동하다가도 틈을 보이는 즉시 빠르게 침투해 후방을 교란하곤 했습니다.

대포병전의 선구

바겐부르크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화력을 자랑했습니다. 후세미아군은 초기 화약병기를 먼저 도입해 전장을 장악하곤 했죠.

회전式 화포 ‘오르그’의 위력

특히 ‘오르그’라 불리는 다연장 회전식 화포는 바겐부르크 진형의 킬러 웨폰이었습니다. 여러 총열을 돌려가며 연사할 수 있어 파괴력이 상당했죠. 기사 부대를 상대로 무시무시한 위력을 발휘했다고 합니다.

초기 야포의 운용

후세미아군은 각종 경포와 臼砲도 사용했습니다. 마차 위에 포를 얹어 기동성을 살리기도 했죠. 화약무기의 잠재력을 일찍이 간파한 셈입니다. 이는 훗날 대포병전의 서막을 알리는 선구적 시도였습니다.

바겐부르크 전술의 활약상

비트코프 전투와 대첩

1420년 7월 보헤미아 남부의 작은 마을 비트코프. 이곳에서 후세미아군이 황제 지크문트의 십자군을 대파하며 바겐부르크 전술이 첫선을 보입니다.

지슈카의 지휘와 마차 부대

지슈카는 언덕 위에 바겐부르크 진을 구축하고 기사군단을 유인했습니다. 경사면에서 돌격의 힘을 잃은 기사들을 향해 집중포화를 퍼부었죠. 마차 부대의 기습까지 더해져 십자군은 혼비백산합니다.

젤레나호라 전투로 이어진 승리

비트코프 전투의 여세를 몰아 후세미아군은 젤레나호라에서 십자군 주력을 또 한 번 무찔렀습니다. 바겐부르크 전술로 얻은 첫 승리에 사기가 충천했던 덕분이죠. 개혁 세력의 존재감을 일약 부각시킨 계기가 되었습니다.

타보르파의 전술 계승

후세미아 진영은 후스 사후 온건한 프라하 계열과 급진적인 타보르 계열로 분화합니다. 전투에서 타보르파가 바겐부르크 전술을 주도적으로 펼쳐나가죠.

타우스 전투의 승리

1431년 봄 타우스에서 타보르군이 또 한 번 십자군의 대군을 무찔렀습니다. 레오폴드 공작이 이끄는 8천여 명의 기사들이 바겐부르크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죠. 화약병기로 무장한 마차 요새의 위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전투였습니다.

리판 전투에서의 惜敗

1434년 5월 리판 전투에서 타보르파는 바겐부르크 전술로 선전했으나 아쉽게 패했습니다. 상대인 프라하군도 같은 전술을 쓴 탓에 우위를 점하기 어려웠죠. 내부 분열이 화를 불렀다고도 할 수 있겠네요.

바겐부르크 전술의 영향과 한계

이후 전술 발전에 끼친 영향

바겐부르크 전술은 기병에 편중된 중세의 군사 패러다임을 뒤흔든 혁신이었습니다. 이동성과 화력의 중요성을 일깨워준 계기가 되었죠.

기병과 보병의 역할 변화

바겐부르크에 고전한 기사들은 전장에서 입지가 좁아졌습니다. 반면 총안 속 보병의 약진은 폭발적이었죠. 이는 훗날 장대병, 총포병으로 이어지는 변화의 신호탄이었습니다.

전술의 한계와 극복

하지만 바겐부르크에도 결정적 한계가 있었으니, 그것은 지형의 제약이었습니다. 평지가 아니면 대형을 유지하기 힘들었죠. 숲이나 울퉁불퉁한 길에선 별 쓸모가 없었습니다.

기동전의 모색

이러한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후세미아군도 기병대를 늘려갔습니다. 경기병을 양성해 정찰이나 기습에 활용했죠. 전면적인 바겐부르크 의존에서 벗어나려 한 것입니다.

바겐부르크 전술은 중세 전쟁사에 독보적인 혁신으로 기록될 만합니다. 기병에 맞서 마차와 총포로 싸워 이긴 平民군대의 저력을 보여준 사례니까요. 물론 시대를 너무 앞서간 나머지 한계에 직면하기도 했지만, 기병과 보병, 화약병기가 조화를 이루는 근대 초기 전술의 선구 노릇은 톡톡히 해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전술 그 자체보다도, 마차로 전장을 누비며 싸웠던 후스 전쟁의 병사들 내면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신앙의 자유를 위해, 혹은 민족의 존엄을 위해 목숨 걸고 투쟁했던 그들. 전쟁터에 마차를 끌고 나간 것은 어쩌면 필사의 각오를 상징하는 행위 아니었을까요.
불의에 굴하지 않고 시대를 앞서가는 변화의 기수가 되려 한 그들의 용기와 결기를 오늘날 우리도 본받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비록 바겐부르크는 역사의 유물이 되었지만, 그 정신만은 영원히 되새길 가치가 있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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